성서대학

76. 하나님의 아들

2017.01.2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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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세례 요한은 요단 강가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여기서 본문이 분명히 하나의 환상을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이 열렸고, 하나님의 영이 요단 강물에서 올라온 예수님 위에 비둘기같이 내려왔습니다. 세례요한이 그 시간에 본 것은 전에도 있었고 나중에도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에게 없던 영이 그 시간에 비로소 주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이 하늘에서 들은 소리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소리였지, “이는 이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 되었다.”라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옛 계약에서 새 계약으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모든 복음서 가운데에서 세례요한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에 걸맞게- 그는 인간 예수님에 대한 계시와 인식을 처음으로 얻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계시가 미리 일어난 사건이었으며, 하나님이 친히 그의 눈과 귀를 향해 예수님의 참 모습을 처음으로 선포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십니다. 바로 그러한 자로서 그분은 처음부터 그분의 모든 모습에서 영적인 인간이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영이 내려옴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시는 분이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신 분이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함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 인간, 높은 인간, 왕과 같은 인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자신의 자녀와 계약의 동료로 만드시는 사건이요, 그를 교회 안의 생활로 부르시는 사건입니다. 세례는 이 사건이 인간의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로 보존하길 원하시는 객관적인 현실이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세례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말씀과 행위로써 인간을 향해 오셨으며, 오시기를 멈추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하지만 세례는 죽음의 위협과 생명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그 한가운데에서 위협을 당하지만, 또한 구원도 받습니다. 세례는 인간이 처 번째 주역이 아니라 분명히 두 번째 주역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세례의 본질은 이와 같은 상징, 이와 같은 증거, 이와 같은 표징이 되는 데 있습니다. 세례가 단지 하나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른 모든 것은 제외하더라도, 이미 그 부적절한 상응 속에서 드러납니다. 세례가 객관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인간의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죽음과 영생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예리하게 표현하더라도, 세례의 상징적인 형태는 궁극적으로는 위험하지 않은 위협이고 구원입니다. 요한복음 1:8에서 세례요한에 대해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라고 말한 것은 세례에 대해서도 타당합니다. 이 말은 세례의 한계성을 선포합니다. 세례의 고귀한 사명은 실로 이 역사를 가장 생생하게 표현하는 , 생생한 모형이 되는 것으로 그칩니다. 세례는 교회의 출입문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모든 출발에서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출생을 보여주는 표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