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대학

81. 우리아버지

2017.03.0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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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초대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우리의 형제가 되어주시고, 우리를 자신의 형제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기도문이 말하는 “우리”라는 말은 아주 특별히 우리를 위해 아버지가 되어주신 한 분 아버지를 전제합니다. “우리”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하는 사람의 사귐을 의미합니다. 곧 기도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형제관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자신과 하나가 되어 한 입술과 한 영혼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초대하고, 허락하고, 명령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라는 말은 기도하는 사람이 그분과 함께하는 모든 사람과 맺는 사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부르는 이 모임의 사귐 안에서 “우리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도들의 사귐을 나누고 있지만, 아마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사귐을 나누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 인류를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이러한 중보기도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 인류와의 이러한 사귐 안으로 들어갑니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기도하지 않는 모든 사람의 대리자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 잃어버린 사람들과 연대관계를 맺으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늘! 이것은 창조된 세계의 한 부분, 위에 있는 부분, 접근할 수 없고 파악 할 수 없는 창조의 한 부분을 말합니다. 하늘에 계신 분은 하늘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 하늘 너머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경계선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파악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십니다. 하나님에게는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능가하십니다.

이런 표현은 하나의 이념과 추상적인 개념으로부터 끌어온 것이 아닙니다. 이런 표현은 제한되고 파악될 수 있고 시간에 속한 것과는 정반대 되는 것들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이 모든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비로부터 비로소 그 의미를 얻게 됩니다. 그분의 ‘초월성’, ‘하늘’ ‘너머에 계신 그분의 존재’라는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칸트의 철학 혹은 플라톤의 철학도 하나님의 초월성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은 파악될 수 없는 것, 우리보다 더 높은 것의 경계선까지만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철학은 하늘 주위를 맴돕니다. 오직 복음만이 하늘에 계신 분, 하늘 너머에 계신 분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 어떤 신령한 자도, 그 어떤 관념주의자나 실존주의자도 우리를 하나님의 현실로, 그분의 초월성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초월성은 영이나 불가시성과 다른 것입니다. 그분의 초월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전능한 자비의 깊음 안에서 입증되고 드러나고 실현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