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대학

46. 악인의 형통함과 시인의 대응

2016.09.14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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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3:12-19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정책을 보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성서시대를 살던 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괴롭혀온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악인의 형통함이다. 성서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에서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당연히 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그들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려는 의인으로 하여금 수많은 의문을 자아내게 하였다.

앗수르가 멸망하고 더욱 악한 바벨론이 유다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악인의 번창함과 하나님의 정당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던 하박국 선지자나, 바벨론 포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이 지은 죄는 인정하지만 어떻게 유다보다 더 죄가 많은 바벨론에게 망하게 할 수 있느냐며 의문을 제기했던 많은 포로민들과 같이 악인의 형통함은 당시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였다.

성서시대뿐 아니라 최근의 상황에서도 이 고민은 해결되지 않은 듯하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듯하다. 악한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번영을 누리고 있고 의인들은 아직도 그들 밑에서 수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의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원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시편 73편은 많은 지혜를 우리에게 준다.

지혜시편인 시편 73편의 시인은 오늘도 형통하고 있는 악인으로 말미암아 고통 가운데 있을 의인들을 향하여 자신이 성소에서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주고 있다. 즉, 그가 바라본 하나님은 역사를 분명히 자신의 의도대로 변화시키시는 분이며, 궁극적으로 악인을 멸하고 의인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때론 현실 속에서 악인의 형통함과 같이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큰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악인의 멸망이 당장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시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이후에는 악인의 형통함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인의 번영은 한낱 꿈과 같이 하나님께서 곧 사라지게 하실 것을 시인은 확신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자세는 분명히 변했다. 다시 말해 시인은 악인이 망하는 모습을 보고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모든 것을 맡겼을 때 그가 바라보는 현실은 더 이상 악인이 형통하는 현실이 아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세상이었으며 다소 지연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