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대학

57. 다윗의 피신처 엔게디

2016.09.14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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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4:1-3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쌔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은 왕이 되기 전, 골리앗을 죽이고 이후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써 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왕이었던 사울은 다윗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를 자신의 왕권에 도전으로 보고, 이후 평생을 다윗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다윗을 뒤쫓았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도망다니다 엔게디 요새 혹은 엔게디 황무지에 거하게 된다. 다윗은 주로 자신의 근거지역인 유다지파 지역 중 사람들이 잘 거하지 않는 유다 광야지역에서 사울을 피해 다녔는데 그를 따르는 4백여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다녔다(삼상 22:2).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엔게디와 같은 유대광야 지역에서 4백여 명이 함께 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엔게디의 지리적 위치는 사해 근방의 척박한 지역이었고 물이 없기 때문에 사막과 같은 지역에서 단 몇 일을 견디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엔게디(Ein Gedi)의 이름에서 해결의 열쇠를 찾을 수 있다. 엔게디는 “염소의 샘”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지명에서 ‘엔(Ein)’이 들어 있는 곳은 모두 시원한 샘물이 솟아나는 지역이다. 엔게디 역시 주변 지역은 황무지였지만, 이 지역은 물이 풍부한 오아시스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장기간 기거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또한 엔게디에는 광야지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큰 폭포가 있어 최소한 물 문제에 있어서는 아무 걱정이 없는 곳이었다. 이러한 특징에 덧붙여 주변은 수많은 마른 산과 동굴이 있었기 때문에 동굴을 바꿔가며 은신한다면, 엔게디는 도망자에게는 최고의 도피처가 될 수 있었고 반대로 추적자에게는 복잡한 미로와 같은 장소였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이 3천 명이나 되는 사울의 군인이 다윗을 잡기 위해 왔어도 그들이 은신하는 동굴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의 사건에선 오히려 다윗이 숨어 있던 깊은 동굴의 입구에 사울이 들어와서 잠시 눈을 붙이다가 다윗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자르며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의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며 사울을 살려주었다. 사울이 이러한 실수를 하게 된 것도 다윗 죽이기에 급급한 나머지 엔게디라는 지역의 특징을 간과한 데 있었다.

이후의 역사에서도 엔게디는 이러한 지형적인 특징 때문에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게릴라전을 펴는 데 최적지가 되었고, 주후 132년 로마제국에 대해 제 2차 유대인 반란때에는 제 1차 반란 때 마사다가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의 최후 거점지가 되어 로마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현재 엔게디는 엔게디 키브츠가 국립공원으로 아름답게 개발하여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장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