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대학

19. 다윗의 아킬레스건

2016.09.14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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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 20:1-2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 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    

     다윗은 예루살렘 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유다지파 출신이라는 배경을 이용하기보다는 다른 지파를 우선 배려하고 뿌리깊은 지역 감정의 골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망국적인 지역 감정은 항상 다윗을 괴롭혔다. 다윗이 유다지파 출신이라는 점은 다윗의 배경중 가장 장점이기도 했지만 다윗의 가장 약한 아킬레스건이기도 했다. 다윗은 원래 유다의 왕으로 7년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이후 사울왕의 잔존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자연스럽게 흡수 통일을 이룩하고 33년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을 다스렸다(삼하5:5)
    다윗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리는 동안 유다는 항상 다윗을 따랐지만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는 호시탐탐 독립을 꾀하며 사울의 잔존 세력의 세를 규합하려 하였다. 또한 다윗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유다 사람이라 하여도 자연스럽게 반유다지파 정서에 호소하여 다윗을 곤란하게 만들곤 하였다. 이러한 정서를 등에 업고 다윗 시대에 일아났던 대표적인 반란은 압살롬의 반란과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반란이다. 압살롬의 반란은 아들이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이 되려한 패륜이다. 압살롬은 당연히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이 가지고 있는 반유다지파, 반다윗 정서에 호소하여 큰 호응을 얻기도 했고, 예루살렘을 일시 점령하고 다윗을 잠시 생사의 기로에 서게도 만들었다.
    이때 쫓겨가는 다윗을 따라 요단강을 건너간 지파는 유다지파뿐으로 지역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진 현실을 목도할 수 있다. 이후 반란이 진압되긴 했지만 지역감정은 근본적인 치유가 되지 않고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이 다윗의 통치를 괴롭혔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이상처를 건드리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는 사울왕과 같은 지파 출신인 베냐민 지파 비그리의 아들 세바였다. 세바는 사울 집안의 복귀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통일 왕국 공동체가 입은 상처는 매우 심각했고 언제든지 왕국이 분열로 치달을 수 있다는 위기가 이스라엘 공동체에 휩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비유다지파에 대해 일관된 관용 정책으을 폈다. 반란의 상황에서 다른 편에 섰다 할지라도 보복하지 않았다. 압살롬에 쫓겨가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욕설을 퍼부으며 저주하였던 사울의 친척 시므이에 대해서도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보복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정당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보복을 하면 지역감정의 뇌관을 건드리게 되고 나라는 분열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공격한 사람에 대해 대국적인 관용정책을 폈던 다윗의 현명한 판단은 우리에게 깊은 귀감이 된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역감정을 부추겨서라도 생존하려는 이 새대 일부 사람과는 분명 많은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