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대학

23. 정치개혁자 히스기야

2016.09.14 18:50

관리자 조회 수:111

  왕하 18:6-7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요시야와 더불어 최고의 종교개혁자로 알려진 히스기야는, 부도덕하며 유다가 유일신 신앙을 지키는 데 최대의 장애물인 앗시리아에 대항한 정치개혁자의 모습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열왕기하가 보도하고 있는 정치개혁자로서 히스기야의 모습은 무모할 정도로 철저한 ‘반앗시리아 정책’으로 대변되고 있다. 히스기야는 친앗시리아 정책을 끝까지 표방한 그의 아버지 아하스왕과는 달리 처음부터 앗시리아의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앗시리아 사르곤 2세의 3차례의 서방 원정이 끝난 후 그들의 간섭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자 국가를 전시체제로 개편하고 반앗시리아 동맹을 결성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앗시리아의 세력은 여전히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견할 수 있는 앗시리아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수로 건설과 성벽 건설을 단행하였다.
    히스기야가 수로 건설을 단행한 이유는 앗시리아의 침략시 예루살렘성이 포위되더라도 최대한 견딜 수 있는 방비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성밖 기혼 샘의 물을 성 안 실로암 연못까지 끌어들이기 위하여 장장 535m의 지하 터널을 파는 공사를 하였다. 이 터널을 우리는 히스기야 터널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터널을 공사할 때의 과정은 1880년에 발견되어 지금은 이스탄불 박물관에 있는 실로암 석비에 잘 나타나 있다. “...동굴이 뚫리던 날 인부들은 손에 도끼를 든 채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샘물이 연못으로 1,200규빗이나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바위의 높이는 인부들 머리 위로 100규빗이나 되었다.”
    또한 히스기야는 앗시리아 왕의 침공에 대한 대비로 예루살렘 가옥을 헐고 성벽을 강화하였다(사 22:9). 이렇게 자주국방을 강화하기 위한 히스기야의 치밀한 행적에 대해선 적국의 왕인 산헤립의 기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즉, 히스기야는 46곳의 요새화된 성읍을 가지고 있었고 정규군뿐만이 아니라 비정규군 제도도 운영하면서 앗시리아의 침략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정치 개혁은 반앗시리아 정책에 비협조적인 나라의 응징과 여러 소국가들 사이의 결속력 강화 정책으로 확대되었다. 그는 앗시리아에 충성하였던 실리벨왕이 다스리던 블레셋 가사 영토를 점령하였고(왕하 18:8) 가드까지 장악하여 요새화하였다. 또한 팔레스틴 주변의 암몬, 모압, 에돔까지 이 동맹에 가입시켰으며 이집트의 지원을 약속받기도 하였다(왕하 18:21).
    열왕기하에서는 히스기야의 종교개혁 보도(4절)보다는 그의 정치 개혁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88절)하고 있다. 다시말해 강대국 앗시리아에 대항했던 그의 행적을 종교개혁 못지 않게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부도덕하고 비신앙적인 강대국에 대한 하나님 중심에 선 히스기야의 개혁적 대응은 강대국에 고개 숙이기에 익숙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