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대학

18. 다윗의 지역주의 극복

2016.09.14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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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상 5:7-10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그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들어 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다윗이 그 산성에 거하여 다윗성이라 이름하고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강성하여 가니라.”    

     사람사는 곳이 대부분 비슷하겠지만 고대 이스라엘에도 지역감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야곱의 아들 중 다른 형제들보다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던 유다는 이스라엘의 지파가 형성되었을 때도 가장 빼어난 지파였기 때문에 유다지파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나머지 지파들은 에브라임을 중심으로 반유다지파라는 날카로운 대립의 각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은 이러한 유다와 에브라임의 대립구도에서 이 둘의 완충지역에 위치하였던 미약한 베냐민지파 출신으로 불안하지만 과도기적 왕정체제를 이끌어 나갔다. 사울왕국은 이후 골리앗과의 전투 이후 백성들 사이에서 급부상한 유다지파 출신 다윗으로 말미암아 붕괴되고 이스라엘은 명실상부한 통일왕국을 이룩하게 되었다.
    통일왕국의 지도자 다윗이 해결해야할 최우선의 과제는 지역주의 극복이었다. 유다와 반유다라는 사사시대부터 이어 내려왔던 날카로운 대립구도는 다윗의 통일왕국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었다. 다윗은 모든 정책에 있어서 남북 문제로 대변되는 비유다지파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화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애써왔다. 다윗은 그 첫 번째 시도로 수도를 천도하기로 결정한다. 다윗의 근거지이자 유다의 수도는 헤브론이었다. 다윗이 만일 통일왕국의 수도로 헤브론을 고집했다면 나머지 11개 지파의 무서운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기반을 포기하고 북쪽의 근거지로 수도를 옮길 수도 없었다. 다윗은 판단하기 힘든 이러한 진퇴양난의 상황속에서 현명한 선택을 내렸던 것이다.
    다윗은 당시까지 유다에도 속하지 않았고 다른 북쪽 지파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남쪽 유다에 근접한 여부스라는 이방족속이 다스리고 있었던 예루살렘을 유다와 다른 지파가 함께 연합하여 점령하고 수도로 삼으려고 했다. 해발 790m 지역에 위치하고 3면이 골짜기인 천혜의 방어 지형을 가지고 있던 예루살렘은 말 그대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여부스 사람들은 소경이나 절름발이가 지켜도 다윗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다윗은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주도면밀하게 주변의 지형지물을 살펴보았다.
    기혼샘에서 예루살렘 성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지하터널과 수직갱도의 존재를 발견하여 그곳으로 기습하여 올라가서 여부스를 점령하고 통일왕국의 수도로서 예루살렘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예루살렘은 성서의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게 되었고 훗날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완성되면서 모든 성도들의 흠모의 대상이 된 성서의 가장 대표적인 거룩한 도시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다윗은 이와같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지 않고 망국적인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근거지를 과감히 옮기고 남과 북이 함께 예루살렘 점령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게 하여 국가의 화합을 이끌었다. 다윗의 예루살렘 천도는 단순한 수도의 천도가 아니라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다윗의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