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대학

78. 무리를 불쌍히 여기심

2017.02.11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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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 표현은 번역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합니다. 예수님이 목격하신 슬픔은 다만 그분에게, 그분의 마음에 다가왔을 뿐 아니라 -‘동정’이라는 말로는 이를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분의 마음 안으로, 그분 자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그 슬픔은 완전히 그분의 슬픔이 되었습니다. 아니 그분의 슬픔은 슬퍼하는 자들의 슬픔으로서 궁극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그분은 그들의 슬픔을 벗기시고, 그들의 슬픔을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 더는 그들의 슬픔이 아니라 그분의 슬픔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들 대신에 슬픔을 감수하셨습니다. 슬퍼하는 자들의 모든 애통은 다만 하나의 메아리가 되었을 따름입니다. 그 애통은 벌써 극복되었으며, 쓸모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슬퍼하는 무리와 함께, 사람들과 함께 슬픔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그들의 편이셨습니다.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강하게 그들의 편이 되셨습니다. 실로 언뜻 보면 무리는 다만 복음서가 말하려는 이야기의 배경으로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분은 그들의 고통을 벗겨내시고, 그 고통을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큰 고독 속으로, 가장 큰 고독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신 무리의 슬픔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신 이유는 – 마태의 분명한 해석에 따르면 –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에스겔(34장)을 빗댄 말이므로, 바로 이로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양과 같은 그들에게는 목자가 있었지만, 목자가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자는 참 목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없는 ‘참’ 목자란 무리를 위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그리고 전적으로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나! 나!”하고 외치는 무리의 어리석은 소리를 들을 것이며, 이 소리의 진정한 의미를 그들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배척하지 않으며 경멸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과 그들을 실제적이고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알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모두 불러모을 것이며, 그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있는 곳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에게서 그들은 이름도 없는, 비인간적인 집단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인간의 무리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라고 고백하는 시편 23편의 의미를 정확히 실천하시면서 – 그들의 슬픔을 보셨습니다. 그들을 향한 그분의 자비는 그들의 황량한 마음을 파고 들어갔습니다. 참으로 왕과 같으신 그분에게, 인간의 자비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반영하신 그분에게 무리의 슬픔은 다만 마음에 다가왔을 뿐 아니라 그분의 마음 안으로, 구분 자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